– 이 글은 필자가 신앙생활 가운데에서의 실패를 통해 얻은 교훈,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온 신앙의 여정 속에서 그 대화를 통해 얻은 교훈을 정리한 글이다.
1. 서언: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삶, 예수 그리스도가 주관하는 삶을 선택하기 위하여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만만하지 않다. 잔잔하기도 하고 때때로 폭풍우가 몰아친다. 삶은 때로는 기다려야 하며, 피할 때가 있고, 신속하게 맞서야 할 때도 있으며,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신중하게 행하여야 할 때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시절과 상황 속에서 크리스찬은 단순하게 한 가지 신념을 붙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다’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예수는 인생을 살다가 막다른 길에 도달했을 때, 곤란한 상황에 처해서 어떠한 판단이나 결정을 내리기에 능력의 한계를 절감할 때, 그리고 모든 희망이 사그러지며, 열정이 식고, 의지와 노력을 기울일 만한 힘이 전혀 남아있을 지 않게 될 때, 그 모든 순간의 마지막에 등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더욱 중대하다.
삶과 인생의 모든 순간의 시작부터 함께 하시며 어떠한 순간에도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는 ‘인생의 주관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생의 길을 갈 때 그 걸음마를 떼는 순간부터, 사소하거나 중요하거나 그 모든 판단과 결정, 결단의 순간에, 그리고 내가 호흡하며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길이 되셔서 인생의 길을 열어주시고, 진리로서 분별케 하시며, 그의 어린 양의 새 생명과 힘 되어주시는, 친히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관자가 되시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삶, 예수 그리스도가 주관하는 삶을 위한 방법에 관하여 실패를 통한 경험과 지난 신앙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축적해온 교훈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특히, 본고에서 그러한 교훈은 신앙의 중심과 내면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2. 자기 성찰과 내면의 질서: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둘 것인가? 심는대로 거둔다.
갈라디아서 6: 7 – 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신의 동기를 감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날마다 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무엇을 심든지 심는대로 거둘 것이다. 우리는 과연 지금 무엇을 위해 심고 있는 지 명확하게 분별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위한 삶, 그것을 위하여 심는 삶을 위해 위 성경 말씀이 경고하고 있는 바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기만의 문제가 순전한 동기 문제의 선결과제가 되는 것이다. 과연 정욕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인가? 자기 기만에 빠져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 진정한 동기는 정욕에서 발원한 것은 아닌가? 자기 기만의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자기 성찰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기 성찰은 인간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심령의 감찰은 인간의 판단능력을 초월한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잠언 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동기가 정욕에 뿌리박고 있는 경우에, 성령의 은혜를 힙입어 자기 성찰을 통한 깨달음이 있다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회개의 기도이다. 정욕과 그로 인한 죄의 문제를 정직하게 하나님께 고백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죄 사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 은혜, 그리고 사랑으로 덮어주심이다. 죄사함 이후로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생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공급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한 자기 사랑이다. 정욕의 만족을 포기하고 대신에 하나님의 사랑과 생수로 갈급함이 충족되는 새 생명으로의 변화 또는 변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올바르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정욕의 동기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웃 사랑에 이르는 최고 계명의 실천을 위하여, 그리고 그러한 삶 속의 영생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마태복음 22:36 – 40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러한 자기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죄성(罪性)에 해당하는 ‘자기애’(自己愛)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죄의 정욕과 자기애와는 분리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 보존되는 자기 사랑의 출발점은 자기 성찰이다. 이는 내면에서 나의 욕심과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집중하여 그 동기의 정직성과 거룩을 감찰받기 위함이다.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하여 얼마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간의 ‘내면’이라는 것은 시각에 의하여 용이하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각에 의지하지 않고 주의깊은 자기 성찰을 통해 통찰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습관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내면 세계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심히 지나친다. 관심과 주의력의 대부분은 나의 외부로 향하며, ’환경’과 ‘조건’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 세계의 필요에 충분한 주의를 쏟지 않고, 관리하지 않는다면, ‘옛 사람’됨을 벗어날 수 없다. 옛 사람의 삶은 외부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서 살아가는 인생이다. 사려깊은 자기결정 과정을 통해서 상황에 대하여 주도력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따라가는 인생과, 주도적으로 기획하며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인생’에서 무심하게 전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옛 사람의 인생방식이다.
내면이 방치되면, 끊임없이 성취되어야 하는 새 사람으로의 변화는 내면에 침전되는 무질서와 혼동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 것이다. 내면의 무질서와 혼동의 원인이 되는 것은 주로 정서적인 것들이다. ‘분노’, ‘증오와 미움’, ‘용서못함’, ’상처’, ‘좌절’, ‘두려움’, ‘열등감’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러한 정서적인 문제들은 본질적인 ‘사랑’으로 치유 및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善)으로부터 벗어난 방법과 수단을 통하여 해소하고자 하는 동기로 굳어진다. 내적으로 치유되지 못한 정서적 문제들이 타자(他者) 또는 약자(弱者)에 대한 의심(친밀한 신뢰관계 형성 저해), 분노, 공격, 괴롭힘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자기 방어심리가 극단적으로 작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가인’이 단적인 예가 되는 인물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은 인정받지 못한 좌절감과 분노를 ‘선’하게 다루지 못했다. 그 분노를 무죄한 아우, 아벨에게 표출하여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창세기 4: 5 – 8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르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에게 (‘우리가 들로 나가자’)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이 시대의 ‘가인’은 누구인가? 내면에 분함과 열등감, 인정받지 못한 좌절감이 쌓여 ‘안색이 변하고, 낯을 들지 못하는’ (평안의 상실과 자존감의 손상) 방황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러한 내면의 문제로 타자(他者) 또는 약자(弱者)에 대하여 무형 또는 유형의 폭력을 행사하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다양한 원인으로 인하여 내적으로 존재하는 좌절감과 분노를 ‘선’한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하여 인간의 ‘자유’와 ‘사랑’에 대한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인”이 존재한다.
‘옛 사람’에 관한 논의로 돌아와서, ‘옛 사람’으로 안주한다는 것은 마음이 굳어지고,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하여 열린 마음이 아니라 방어적이거나 또는 (방어를 위해) 공격적이 되며, 자기 자신에게 변화를 위한 새로운 기회를 주기보다는 익숙한 것에 자족하는 것, 또한 내면에 침전되는 부정적인 정서, 감정, 기억 등을 새롭게 재정리 및 해소하지 않고, 그대로 내면에 묵히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골로새서 3:9 – 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옛 사람으로의 안주는 진정한 자기 사랑의 실패이며, 그로 인한 자기 방어적 또는 공격적 성향은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를 통해 나를 통해 흘러 이웃에게 전파되는 것을 막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한 자기 사랑의 실패가 결국에는 이웃 사랑의 실패 원인이 되는 것이다.
때가 늦지 않도록 자신의 내면을 성실하게 점검하고, ‘새 사람’을 지향하는 마인드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마음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을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자신의 동기와 내면의 정욕을 감찰할 수 있다. 정직하지 못한 동기와 육체의 정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영생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심고 거두어도 결국에는 헛된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새 사람을 빚어낸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 어떠한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대하는가? 말씀의 본질과 권능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말씀은 단순히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며 변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의 상황과 문제에 대하여 ‘말씀으로 고민하는 힘’이 있는가?
(1)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다.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떡’은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매일 섭취해야 하는 ‘영양과 음식’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렇게 ‘떡’을 먹어야 하는 이유만큼, 또한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말씀을 취하는 것이다. 위 말씀 구절의 의미를 잘 살펴보면, 이런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지 않으면 죽는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가 크리스찬이다. 한국 교회의 많은 크리스찬들이 QT와 말씀 묵상이 쉽지 않은 과제인 것을 경험하고 있지만, 포기하면 안된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든지 잠시라도 접할 수 있는 상황을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크리스찬의 속사람은 생명을 잃어간다. 평안, 감사, 겸손, 온유, 침착, 사랑과 용서와 화평, 모두 잃어간다.
(2) 믿음보다 말씀이 먼저다. [1]
로마서 10장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보다 말씀이 먼저다’ 이 말뜻이 언뜻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 뜻하는 바는 “말씀을 빼고나면 믿음이 남지 못한다” (Take the word away and no faith is left)” 라는 종교개혁자인 칼빈의 교리를 통해 구체화된다.
이 교리가 내포하고 있는 뜻은 “‘믿음’은 인간의 자력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해석적’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때로는 성경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고,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일 때도 있지만, 그러한 때에 억지로 그 내용을 믿어야 한다고 스스로 강요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따라 그 부르심과 말씀의 창조적 역사를 기대하며 겸손히 말씀을 받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부족한 믿음을 채워주실 것이다. 그 채워주심도 성령의 은혜와 함께 말씀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새 사람을 빚어낸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되어 이해되는 율법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창조적 권능을 친히 행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신 역사를 기억하는가? 그 모든 창조의 역사를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이루셨다. 창세기 1장에서 모든 창조의 역사는 “하나님이 이르시되”(God said)로 시작되어, 그 이르신 바가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창세기 창조이다.
이와 같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되었던 것이다. 연약함과 부족함, 옛 상처의 아픔과 심령 속 깊은 쓴뿌리, 불안과 염려, 분노와 용서못함의 옛 사람을 벗어내고, 새 사람이 되고 싶다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창조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야 한다.
에베소서 4:22 – 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귀납법적 성경공부법에 관하여는 별도의 글을 마련했다. 아래는 글과 참고할 동영상의 링크이다.
[youtube http://youtu.be/BsFcf4sJHgU]
4. 영성과 지성, 두 날개를 강화하라
지성과 영성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 크리스찬에게 필요한 것이다. 현실을 감당하고 승리해야 하되, 이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혜롭고 선하게 성취해야 한다.
마태복음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또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충성하는 자는 현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하여 현실에 관한 지식을 활용해야 한다. 영성이란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 성령의 은혜와 말씀의 능력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의미하며, 지성은 ‘사고할 수 있는 힘’, 습관과 훈련을 통해 습득되는 것으로서, 타자(他者, 이웃과 세상)을 이해하고 그를 섬기기 위한 기본 요건에 해당한다.
영성과 지성이 상호 간에 단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상호촉진적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성을 통해 지성의 잠재력과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가 공급될 수 있고, 지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탐구와 이해가 가능해진다. 영성을 기초로 하고, 지성을 활용하여 세상 속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5. Comfort Zone(안전지대)을 뛰쳐나가라.
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그의 권능에 힘입어 사는 인생은 엄청난 위기와 고난의 순간에, 그러한 위기와 고난에 휩쓸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그 고난의 풍랑 위를 담대히 걸어가는 인생이다. 사실, 인간은 덮쳐오는 풍랑보다 연약한 존재일 뿐이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힘입어 사는 인생은 풍랑에 휩쓸리지 않으며 능히 감당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안전지대’(comfort zone)를 뛰쳐나가야 하며,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의 역사와 그것을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이 요구된다.
마태복음 14장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느 어두운 밤, 폭풍우와 풍랑 속에 갇혀, 힘겹게 배의 노를 젓고 있었던 일화가 소개된다. 그들이 침몰의 위기에 빠져있던 순간,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다.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시던 예수를 목격한 제자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 예수께로 갔고, 다른 제자들은 배에 남았다.
마태복음 14: 25 – 32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베드로는 주의 권능에 힘입어 믿음으로 바다 위를 걸었던 믿음의 승리자였고, 폭풍우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승리자였다. 주의 권능을 신뢰함으로 ‘나를 명하사’라는 간청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렸고, ‘오라’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했던 결과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어가는 모습을 목격하였지만, 여전히 배에 남아있던 제자들이 있었다. 믿음이 없던 자요, 또한 자신들이 타고 있던 배를 안전한 곳으로 여겨 이를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의지했던 자들이다.
삶 가운데, 특히 폭풍우와 같이 몰아쳐오는 고난과 위기의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도 믿음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자기 판단에 따라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는 곳에 숨는 인생이야 말로 실제로는 가장 위험한 인생이다. 배에 남았던 제자들과 같이 가장 안전하다고 안주하여 숨은 배에 남아있는 한 풍랑과 폭풍우에 휩쓸리는 상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고난와 위기의 풍랑 위를 담대히 걸어가는 자가 담대하게 그 상황 속에서 승리하는 자이다. 풍랑에 휩쓸려가는 인생을 선택하지 말라.
5. 결어
한 때는 뜨겁고 깊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던 신앙의 순간들을 경험했거나, 또한 신앙 안에서 진리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 확고했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순전한 신앙을 담보해주지 않는다. 항상 지금의 순간에 깨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가운데 호흡하고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본고에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는 인생을 위해서는 말씀의 살아있는 능력이 필요하고, 이 세상 가운데에서 승리하는 크리스찬으로 살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고민하는 힘’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매일의 삶 가운데 ‘말씀에 대한 성실’을 실천하여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말씀 앞에 겸손한 자는 삶 속에서 말씀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말씀이 잊혀진 또는 상실된 시간을 흘러보낸 후에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무엇을 심고, 거두었는지 확인할 때, 옛 사람의 나태함과 안이함을 선택한 결과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후회의 열매를 거두지 않는 크리스찬이 될 수 있기를 나 스스로와 나의 형제들에게 권고하고자 한다.
Endnote
[1]최승락 (국제신학대학원) ,말씀과 말: 칼빈의 설교관과 수행어(遂行語)로서의 언어 이해, pp. 86 – 88